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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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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재위: 641년 ~ 660년) 13년(653년) 백제는 여전히 왜와 우호를 통하고 [52] 동왕 16년(656년)과 17년(657년)에는 왜국에 앵무새·낙타·당나귀 등의 희귀품을 선물한 바 있다. 백제는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하여 660년 멸망하였다. 그 직후, 복신이 이끄는 부흥군은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였다(661년)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두 기록을 종합해 보면 부여풍은 631년 외교사절로 왜국에 30년간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서기》는 "백제 의자왕이 왕자 풍장을 보내 질(質)로 삼았다"[53] 고 적고 있고, 《삼국사기》에서도 "일찍이 왜에 질(質)로 가 있던 옛 왕자 부여풍을 맞아 왕으로 삼았다" [54] 고 기록한다.[55] 부흥군과 부여풍은 왜에 원병을 요청했다. 왜는 이에 응하여, 병력과 물자를 원조하였다. 663년 8월, 전권을 장악하고 있던 복신과 부여풍의 대립이 격화되어 결국 복신이 부여풍에게 살해당한 뒤, 부여풍은 다시금 고구려와 왜에 사신을 보내 원병을 청했다. 귀실복신의 죽음과 백제 부흥군 지도부의 분열을 기회로 신라는 서둘러 백제 부흥군을 진압하고자 했고, 당은 웅진도독부의 유인원의 증원요청에 따라 유인궤(劉仁軌)가 인솔하는 수군 7천 명을 한반도에 파병했다. 육지에서는 당의 손인사(孫仁師)·유인원 그리고 신라의 문무왕이 이끄는 군사들이, 바다에서는 당의 두상(杜爽) 및 옛 백제의 태자였던 부여융(扶餘隆)이 이끄는 170여 척의 수군이, 수륙협공으로 백제 부흥정부의 수도 주류성으로 진격했다. 이때 육지에서는 백제의 기병이 진을 치고 신라군과 맞섰고, 바다에서는 왜에서 온 함선들이 강변의 모래밭에 정박해 있었다. 왜병 선단은 전군을 셋으로 나누어 공격했지만 전술 및 간조의 시간차로 인해 당군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네 번 모두 대패했다. 수적으로 우세였던 왜의 수군이 당 신라에 이렇다 할 만한 손실을 입히지도 못한 채 궤멸되고 만 것은 선박 건조 기술이나 수군의 전략, 군사 훈련 차원에서 당시 왜가 동아시아에서 얼마나 후진적이었는지는 보여주는 사건으로 꼽힌다. 왜병의 장수였던 에치노 다쿠쓰는 하늘을 보며 맹서한 뒤 이를 갈며 수십 명을 죽이며 분전했지만 끝내 전사했고, 규슈의 호족이었던 치쿠시노기미 사쓰야마(筑紫君薩夜麻)도 당병에 붙들려 8년 동안이나 포로로 당에 억류되어 있다가 귀국을 허락받았다. (→백강 전투)